어느 늦은 오후, 세랭게티의 고원지대를 여행하던 중 딕은 인생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게 될 하나의 질문과 마주쳤다.
그해 동부 아프리카는 유례없는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대한 평원은 바싹 말라 온통 먼지뿐이었고, 강바닥은 쩍쩍 갈라져 있었다. 풀이 자라던 벌판에는 마른 짚 부스러기들만 바람에 흩어지고, 색색가지 그늘로 평원을 물들이던 꽃들도 제 빛깔을 잃은 지 오래였다. 푸석푸석한 평원 위로는 황토색 먼지만이 제멋대로 휘날리고 있었다.
멀리 지평선을 배경으로 300만 마리가 넘는 동물들이 물을 찾아 떼 지어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강이 사라진 대신 동물의 기나긴 행렬이 강물처럼 끊임없이 평원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비참한 풍경이었지만 지구상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기도 했다. 여행은 어느덧 중반쯤 와 있었고, 눈앞에 펼쳐진 황량한 풍경은 이 여행을 떠나게 만든 삶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해가 기울 때쯤이면 신기루가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날이 저물어도 뜨거운 열기는 마치 악몽처럼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우리 일행은 랜드로버 안에서 마치 낡은 헝겊인형처럼 널브러져 마른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문을 꽉 닫아도 차체의 작은 틈새로 쉴 새 없이 먼지가 스며들어 왔다. 모두들 꼼짝없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점점 갈라진 땅바닥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12명의 중년으로 구성된 탐험가 일행은 이미 1만 1,200킬로미터를 행군한 터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내적 탐험'이라는 진지한 주제를 가슴에 품고 아프리카와 '나 자신'에 맞서 정면으로 부딪힌다는 각오로 떠나왔지만 어느새 그들은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특히 리더 역할을 맡은 딕은 안전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과 끝없이 터지는 성가신 일들로 인해 거의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일행은 고원에 위치한 작은 마사이족 마을인 마가두루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서 야영을 한 뒤 아침에 떠날 예정이었다.
마을로 들어서자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마사이족 남자가 갑자기 일행 앞에 쓱 나타났다. 그는 기다란 창을 땅에 박고 한쪽 다리를 허벅지 안쪽에 받친 채 왜가리처럼 서 있었다. 일행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허리춤에 달린 작은 칼을 바로잡더니 돌연 낡은 담요를 활짝 펼쳐 몸에 둘렀다. 그 단순한 동작만으로도 어딘가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있었다. 초점 없는 그의 시선은 일행의 등 뒤로 펼쳐진 메마른 평원을 향해 있었지만 동시에 이 낯선 이방인들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만만하고 진지한 그의 얼굴에선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러다 갑자기 그는 활짝 웃으며 영어와 스와힐리 말을 섞어가며 인사를 건냈다. "짐보! 우리 봄마(마을)에 잘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가이드인 데이비드 피터슨과 재빨리 몇 마디 나누더니 옆에 있는 가축우리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관목 숲에서 여자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딕은 데이비드에게 물었다.
"뭐라는 거죠?" 데이비드가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들이 자기네 소똥 냄새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한다는군요."
그 한 마디가 서먹서먹하던 분위기를 금세 날려버렸다. 일행의 웃음소리는 공중으로 퍼져나가 원주민들의 웃음소리와 한데 어우러졌다.
마사이족 사나이는 자신을 타데우스 올 코이에라고 소개했다. 마을의 족장인 그는 정중하게 딕의 손을 꼭 잡으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곧이어 그들은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코이에는 외국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영어도 그곳에서 배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째서 문명의 이기를 거부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이는 마흔 살 밖에 안 되었지만 그는 여기서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족장인 것 같았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그에게서 뭔가 남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고, 자기 생활에 깊이 만족하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내적 충만함과 안정감이었다.
마사이족은 낯선 사람들에 대해서 몹시 경계하고 의심하는 편이지만, 다행히 일행은 코이에 덕분에 이방인 취급을 면할 수 있었다.
코이에는 사교적이고 재치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는 언어와 관습의 장벽을 초월하고 일행과 자기 부락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신비로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모닥불 가에 둘러앉아 그해의 가뭄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두 눈에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마사이족에게 가뭄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마을을 떠날 때 딕은 보기만 해도 눈부신 자기 배낭을 뽐내듯 걸머졌다. 첨단소재로 만들어진 아주 가벼운 최신 배낭이라 물건을 효율적으로 담을 수 있었다. 겉에는 수많은 버클과 걸쇠, 지퍼가 달려 있고, 크고 작은 주머니들이 칸칸이 붙어 있었으며 안에는 온갖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배낭 회사 입장에서 보면 그는 마치 걸어 다니는 광고판과도 같았다.
딕에게는 짐을 줄일 수 없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일행을 책임지는 리더로서 구급상자를 비롯해 즐거운 여행에 필요한 잡동사니들까지도 빠짐없이 챙겨 넣어야 했던 것이다. 딕은 보이스카우트 출신은 아니지만 '유비무환'이라는 그들의 모토를 신봉했으며,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에 대비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었다.
흡사 짐을 지고 가는 달팽이처럼 뒤뚱거리며 걷는 동안 코이에는 하염없이 딕의 배낭을 흘깃거렸다. 그의 짐이라곤 창 한 자루와 가축을 돌보는 데 필요한 막대기 하나가 전부였다. 코이에는 딕의 배낭에 어떤 것들이 들어있는지 몹시 궁금해 하고 있었다. 딕은 코이에의 호기심이 그저 반갑기만 했다. 자신이 얼마나 여행 준비를 철저히 했는지, 온갖 일에 대비하여 어떻게 짐을 꾸렸는지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으니까.
오후 늦게 다른 부락에 도착해서 캠프를 설치할 때 마침내 기회가 왔다. 딕은 깜짝 놀랄 그의 표정을 기대하며 버클을 풀고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칸칸이 꽉 들어차 있던 온갖 신기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코이에 앞에 펼쳐놓기 시작했다.
각종 식기용품, 가위, 칼, 삽, 방향 탐지기, 천체 망원경, 지도, 수첩과 필기도구, 각양각색의 옷가지들, 비상약, 응급치료 도구, 무엇이든 보관할 수 있는 방수 봉투...,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물건들이 한없이 쏟아져 나왔다.
마침내 배낭이 텅 비고 모든 물건이 바닥에 펼쳐지자 딕은 마치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탐험가가 된 기분이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오지를 탐험할 때 필요한 것들' 이란 제목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장면 아닌가? 딕은 가슴이 뿌듯해졌다.
코이에는 검은 눈을 깜박거리며 작은 쇼핑센터와도 같은 짐들을 하나하나 뜯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몇 분 뒤 딕을 쳐다보고 간단하지만 깊은 울림이 담긴 질문을 던졌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줍니까?"
순간, 딕은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질문에는 아주 강렬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단숨에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가치관의 급소를 파고드는 그 한 마디.
그날 저녁, 딕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몇 주가 지나도록 확실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의 질문은 딕에게 그때까지 짊어지고 온 짐에 대해, 그리고 그렇게 많은 짐을 지고 온 이유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했다. 나아가 이번 여행에 들고 온 짐뿐만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짊어져 왔던 모든 짐에 대해서도.
코이에와 딕은 모닥불 가에 마주앉아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가 하는 말에 스스로 귀를 기울여가며 딕은 삶의 핵심이 되는 가치관을 하나하나 재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정말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지 따져 보았다. 어떤 것들은 행복하게 해주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이 더 많았다. 정말이지 계속 짊어지고 다녀야 할 만큼 중요한 것들은 몇 개 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다시 배낭을 꾸리면서 딕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것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 어떤 사소한 물건조차도 골라내려고 하면 누군가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이봐, 잘 생각해 봐.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 걸?"
딕은 눈을 질끈 감고 물건들을 골라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마을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 다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남은 여정을 마칠 때까지 사라진 그 물건들에 미련을 갖는 순간은 결코 오지 않았다. 오히려 가벼워진 배낭만큼 남은 여행 동안 딕의 마음은 한결 홀가분하기만 했다. 더 놀라운 것은 리더로서 감당해야 했던 책임감과 그에 따른 온갖 스트레스마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낯선 경험을 통해 딕은 삶의 우선순위에 따라 짐을 덜고, 과감하게 버리며 지혜롭게 소유하는 방법에 대한 깊은 통찰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깨닫게 되는 것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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